"그가 다녀가면 백인들은 수영장 물을 새로 갈았다"

[월요화제/ 96세 타계 새미 리]


 USC 의대 졸업 의사돼
유색인종 첫 美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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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도전…인간승리
'자랑스런 한국인'선정

 새미 리는 1920년 중가주 프레즈노에서 한인 이민 2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까지 나왔지만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식당을 운영했다. 새미 리는 열두 살이던 1932년 LA올림픽을 보면서 금메달의 꿈을 가졌으나 당시 유색인종은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에만 수영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백인들은 새미 리가 수영장을 다녀가면 물을 새로 갈고 다이빙을 하는 차별의 아픔을 주었다. 새미 리는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모래를 채운 뒤 뛰어내리는 훈련을 병행해야 했다.

 지독한 편견과 싸우면서 새미 리는 1942년 미국 다이빙선수권 10m 플랫폼과 3m 스프링보드에서 우승했다. 유색인종이 미 다이빙 챔피언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57㎝의 단신인 동양계 새미 리의 선수권 정복은 미국 사회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그는 올림픽 출전을 꿈꿨지만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올림픽 데뷔 무대는 1948년으로 미뤄졌다. 그 사이 그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USC 의대를 졸업해 이비인후과 의사가 됐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그는 10m 플랫폼 정상에 올랐다. 3m 스프링보드에선 동메달을 땄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새미 리는 4년 뒤 32세의 나이로 출전한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우승했다. 다이빙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군의관으로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한국에 파병돼 1955년까지 복무했다.

 이후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1960년과 1964년엔 코치로 미국에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모아계 그레그 루가니스도 그의 제자였다.

 1990년엔 미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올라 아마추어 선수로선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