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평양 원정을 이겨냈다. 이제 요르단과 프랑스로 간다.

한국 여자축구가 평양에서 웃었다. 어려울 것으로 여겨졌던 2018년 여자아시안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며 국민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을 선물했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은 11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18년 요르단 여자아시안컵 예선 B조 마지막 날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유영아(전반 21분) 지소연(전반 23분·후반 8분) 조소현(전반 42분)이 골 폭죽을 터트리며 4-0으로 대승했다. 그라운드에서 솔선수범하며 팀을 이끌 주장 조소현은 이날 A매치 100회 출전 자축골을 작렬시키며 뜻 깊은 ‘센추리클럽’ 가입을 평양에서 이뤘다. 

한국은 북한과 나란히 3승1무(승점 10)를 기록했으나 골득실에서 앞서 B조에 단 한 장 뿐인 여자아시안컵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지난 9일 모든 일정을 마친 북한은 골득실 +17을 기록한 채 이날 한국-우즈베키스탄 결과를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골득실 +16인 상황에서 우즈베키스탄전에 임한 한국은 전반에만 3골을 넣으며 본선행 초읽기에 들어갔다. 후반에 한 골을 추가하며 김일성경기장에서 축제를 펼쳤다. 골득실은 +20이었다. ‘윤덕여호’는 아울러 2019년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여자월드컵 본선에도 바짝 다가섰다. 내년 여자아시안컵 본선 참가 8개국 중 상위 5개 나라가 프랑스 여자월드컵에 가게 되는데 요르단 필리핀 태국 등 본선 진출국 중 중동과 동남아 4개국은 한국이 무난히 이길 수 있는 상대로 평가된다. 2015년 캐나다 여자월드컵에서 16강에 올랐던 여자대표팀은 2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넘어 내년 여자아시안컵에서 일본 호주 중국과 함께 아시아 최고 자리를 다툴 자신감을 북녘 땅에서 얻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80일의 기적’이었다. 준비가 성공을 불렀다. 여자아시안컵은 지난대회 본선 1~3위와 개최국 등 4개국에 다음 대회 자동진출권을 준다. 한국은 2014년 베트남 대회 본선에서 4위를 차지해 이번 대회 예선부터 나서게 됐는데 지난 1월 21일 조추첨에서 하필이면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위로 한 수 위인 개최국 북한과 B조에 들어가는 최악의 경우를 맞았다. 처음 가는 평양 원정에서 실력 좋은 북한과의 승부. 하지만 낙담할 시간이 없었다. 캐나다 여자월드컵 뒤 세대교체를 진행했던 윤 감독은 베테랑 ‘언니’들을 다시 불러 평양 원정을 준비했다. 역대 북한전에서 1승2무14패로 열세였지만 지난달 남·북한이 함께 출전한 키프로스컵에서 북한(3위)보다 하나 높은 2위를 차지하며 자신감을 쌓았다. 

이어 지난달 20일 목포 전지훈련 때부터 평양 원정 맞춤형 대비에 들어갔다. 천둥 같은 북한 관중의 응원에 대비하고자 경기장 곳곳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소음 훈련에 임했다. 김일성경기장과 가장 비슷한 인조잔디를 골라 땀을 흘렸고, 심리 특강도 받았다. 젊은 선수 위주로 바뀐 북한여자대표팀 포메이션과 요주의 인물들을 선수 개개인이 파악하며 남·북전을 기다렸다. 평양에 입성한 뒤 여자대표팀 선수들은 자신감 넘치는 움직임으로 기적을 만들어나갔다. 김일성경기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밝게 웃으며 훈련했다. 지난 7일 남·북대결에선 여자 선수임에도 신경전을 마다하지 않으며 상대와 맞섰다. 북한전에서 승리나 다름 없는 1-1 무승부를 일궈낸 태극낭자들은 이후 홍콩과 우즈베키스탄을 대파하고 북한을 골득실에서 완벽하게 따돌렸다. 

“이길 때가 됐다.” 윤 감독은 평양 입성 전후로 이렇게 말했다. 비록 맞대결 승리는 아니었으나 윤 감독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여자축구의 명장으로 거듭났다. 텔레비전을 타고 안방에 중계되진 않았으나 보도를 통해 국내에 전해진 여자 선수들의 투혼과 헌신은 어두운 정치 상황, 경색된 남북 관계 등으로 우울한 국민들에게 큰 청량제가 됐다. 낯선 땅에서 주눅들지 않고 과감하게 뛰어든 태극낭자들의 도전은 백번 박수받아 부족함이 없다.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고전하고 있는 남자대표팀 선수들이 본 받아야 한다”는 축구계 목소리가 빗발쳤다. 

승패를 떠나 이번 평양 원정은 한국 축구에 큰 자산이 됐다. 북한 축구의 성지로 불리는 김일성경기장에 태극기가 내걸렸고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남북 화해로 가는 길에 스포츠, 특히 축구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증명했다. 북측도 ‘윤덕여호’ 선수들의 훈련과 음식 등에 최선을 다하며 열과 성을 다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향후 남북 축구 교류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여자대표팀 선수들은 12일 오후 5시20분 중국국제항공 122편으로 열흘간 지냈던 평양을 떠난다. 중국 베이징에서 환승한 뒤 13일 0시20분 인천국제공항으로 금의환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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