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 직후 불안한 모습 보여…이틀전 예행연습보다 공격적"
피고측, '김정남 시신 北인도' 쟁점화 시도…증거불충분 주장

(자카르타=연합뉴스) 황철환 특파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암살한 동남아 출신 여성들이 범행 직후 자신들의 손에 독극물이 묻어있다는 것을 아는 듯 행동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들이 북한에 속은 '순진한 희생양'이 아닐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피고측 변호인들은 핵심 증거인 김정남의 시신과 소지품을 북한에 인도한 말레이시아 정부의 조처에 문제를 제기할 움직임을 보였다.

말레이시아 검찰은 11일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진행된 김정남 암살 공판에서 피고인들이 김정남을 공격하는 모습과 범행 이틀전 예행연습을 하는 모습 등이 담긴 공항내 CCTV 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

이 영상은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와 함께 김정남 살해 혐의로 기소된 베트남 국적자 도안 티 흐엉(29)이 지난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의 등 뒤로 접근해 얼굴에 VX 신경작용제를 바른 뒤 달아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티 아이샤가 김정남을 공격하는 장면은 잡히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직후 두 손이 옷이나 몸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급히 현장을 떠났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피한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은 화장실에서 각자 손을 씻은 뒤 택시 승강장에서 합류해 공항을 벗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사건을 수사한 현지 경찰 당국자인 완 아지룰 니잠 체 완 아지즈는 "이는 이틀전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 예행연습보다 훨씬 거칠고 공격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실제 2월 11일 촬영된 공항내 CCTV 영상에서 도안 티 흐엉은 예행연습 상대방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뒤 두 손을 모아 사과했지만, 범행 당일에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완 아지룰은 도안 티 흐엉이 김정남을 공격한 직후 불안한 표정을 한 채 최대한 빨리 현장을 떠나고 싶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한 층 아래 화장실에서 1분여간 손을 씻은 뒤로는 눈에 띄게 태도가 안정됐다고 평가했다.

이는 리얼리티 TV용 몰래카메라 촬영이라는 북한인 용의자들의 거짓말에 속았다는 주장과 달리 피고들이 범행 계획에 대해 상당 부분 알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재판부의 판단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말레이시아 현지법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를 경우 사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은 교수형에 처할 수 있다.

피고측 변호인들은 이에 맞서 검찰이 확보한 증거물의 증거능력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시티 아이샤의 변호를 맡은 구이 순 셍 변호사는 전날 말레이시아 화학청 화학무기분석센터 라자 수브라마니암 소장에 대한 반대신문을 통해 김정남의 양복 상의의 행방을 물었다.

앞서 김정남의 상의 옷깃과 소매에서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가 검출됐다고 증언한 라자 소장은 "양복 상의는 신발과 청바지, 팔찌, 가방, 지갑, 열쇠고리, 시계 등 다른 소지품과 함께 북한으로 보내졌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정남의 상의에서 채취된 샘플 역시 황 등에 노출해 분석하는 과정에서 모두 원형을 잃은 것으로 확인됐다.

라자 소장은 "샘플에서 추출된 물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설명했지만, 구이 변호사는 이것만으로는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면서 "증거물이 모두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말레이시아 정부가 지난 3월 말 김정남의 시신과 소지품을 북한에 인도해 추가적인 샘플을 확보할 길이 막혔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가 북한내 자국민을 전원 억류해 인질로 삼은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굴복해 시신 등 핵심 증거와 북한인 용의자들을 넘겨주는 바람에 '깃털'에 불과한 여성 피고들만 희생양이 됐다는 논리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다만, 재판부가 피고들의 주장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범행 당시 입고 있었던 옷과 손톱 등에서 VX 신경작용제의 흔적이 검출되는 등 두 사람이 김정남을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온 것 역시 불리한 정황으로 꼽힌다.

hwangc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