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출신 피고 "경찰에 잡힌 뒤에야 살인연루 알았다"

(자카르타=연합뉴스) 황철환 특파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암살을 주도한 북한인들은 동남아 출신 여성 공범들의 손에 독극물을 바르면서도 이후 씻어내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는 진술이 나왔다.

20일 현지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이날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진행된 관련 공판에서 베트남 국적 피고인 도안 티 흐엉(30·여)의 변호인은 흐엉이 경찰에 체포된 뒤에야 살인에 연루된 사실을 알았다며 이같이 밝혔다.

흐엉은 작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인도네시아 국적 피고인 시티 아이샤(26·여)와 함께 김정남의 얼굴에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를 발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아왔다.

이들에게 VX를 건네 김정남의 얼굴에 바르도록 한 북한인 용의자 4명은 범행 직후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했지만, 흐엉과 시티는 현지에 남아 있다가 잇따라 체포됐다.

경찰에 붙잡힌 흐엉은 몰래카메라를 찍는다는 말에 속아 살해 도구로 이용됐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와이'(Y)란 가명으로 알려진 북한인 용의자 리지현(34)이 2016년 1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자신을 영입했다면서 "그는 거짓말쟁이다. 그는 비디오를 찍는다며 나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리지현은 범행 당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흐엉의 손에 기름기가 있는 물질을 얹어준 뒤 김정남의 얼굴에 바르기 직전 두 손을 비빌 것을 지시했다.

흐엉은 이 물질이 VX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면서, 리지현도 나중에 손을 씻으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공격 직후 두 손이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아래층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은 이유를 묻는 말에는 성공하면 즉각 자리를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데다 기름기와 냄새, 불쾌한 느낌 때문에 스스로 판단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답했다.

이러한 진술이 사실이라면 북한인 용의자들은 김정남 암살에 동원된 동남아 출신 여성들의 생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유엔이 대량살상무기(WMD)로 규정한 맹독성 신경작용제인 VX는 피부접촉을 통해서도 중독될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씻어내지 않을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북한인 용의자들은 흐엉과 시티가 자신들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 암살에 실패할 확률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경찰과 검찰은 흐엉과 시티가 북한인 용의자들과 김정남을 살해할 공동의 의사를 갖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입장이다.

앞서 말레이시아 검찰은 김정남의 얼굴에 VX를 바른 피고인들이 자신의 몸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화장실로 이동하는 모습이 담긴 공항 내 폐쇄회로(CC) TV 영상을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법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를 경우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살해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면 흐엉과 시티는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

샤알람 고등법원은 작년 10월부터 살인 혐의로 기소된 흐엉과 시티에 대한 공판을 진행해 왔으며, 판결은 이르면 올해 상반기 중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hwangc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