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신원 지금이라도 확인되면 꼬인 실타래가 풀릴 텐데"

(인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13년 전 쌀포대 속 남성의 신원이라도 확인된다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텐데…"

13년 전인 2003년 4월 18일 오전 10시 40분 강원 인제군 가아리 광치령 고개 인근 31번 국도변에서 수상한 쌀포대 3개가 나란히 발견됐다.

당시 고물을 수집하던 중 쌀포대를 발견한 김모(당시 56세) 씨는 혹시 고물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누르스름한 색깔의 쌀포대는 김 씨의 기대와 달리 물컹했다.

순간 이상한 생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선 김 씨는 곧바로 112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이 수상한 쌀포대를 살펴본 순간 현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머리와 팔뚝 아래 팔이 없는 시신이 3개의 쌀포대에 나뉘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시신의 가슴과 팔 등에는 흉기에 찔린 자국이 20여 곳이나 됐다.

경찰은 수십여 곳의 자상 자국과 3등분 된 토막 시신으로 미뤄 원한이나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으로 추정했다.

또 20∼40대 남성으로 키 180㎝가량의 건장한 체격인 점으로 미뤄 폭력조직 간의 소행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머리와 팔 부분이 없어 피살된 남성의 신원 확인에 어려움을 겪었다.

경찰은 공개 전단을 배포해 제보자 확보에 나서기도 했다.

이 남성이 왜 흉기에 찔려 3등분 된 채 산간 고갯길 도로변에 유기됐는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시신이 담긴 황색 쌀포대의 원산지에도 주목했다. 'MADE IN CHINA'라고 표기된 점과 신원 확인이 안 되는 점으로 미뤄 피살 시신을 중국 교포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유사한 쌀포대가 시중에 워낙 많이 유통된 탓에 유력한 단서가 되지는 못했다.

경찰은 쌀포대가 발견된 도로에서 주·정차하거나 포댓자루를 내리는 것을 본 목격자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또 주변에서 사라진 20∼40대 남성을 찾아 6개월간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피살된 남성의 신원을 확보하지 못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결국 이 사건은 피살된 남성의 신원도 알지 못한 채 13년째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당시 담당 경찰은 "일반적으로 상당수 살인 사건은 피해자의 신원만 확인되면 절반은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 사건도 피살 시신의 신원을 지금이라도 확인할 수만 있다면 해결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포함해 2001년 이후 장기 미제로 남은 도내 살인 사건은 모두 15건이다.

올해 초 미제 사건 전담팀을 소재로 한 드라마 '시그널'이 인기를 끌면서 이들 장기 미제 사건이 다시 주목받았다.

2002년 2월 '춘천 Y 모텔 택시기사 살인 사건', 2005년 8월 '양구 전당포 노부부 살인 사건', 10월 '인제 필례 계곡 20대 여성 피살사건', 11월 '강릉 50대 초등학교 여교사 피살사건', 2006년 3월 '동해 학습지 여교사 피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올해도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이들 미제 사건은 또다시 한 해를 넘기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해 7월 31일 '태완이법' 시행으로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미제 사건의 범인을 잡으면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게 됐다.

15건의 미제 사건 중 해당 경찰서에서 담당해온 8건도 강원경찰청 미제 사건 전담팀에서 수사하고 있다.

하지만 미제 사건 전담팀 인력은 고작 3명뿐이다.

미제사건전담팀 관계자는 "한정된 인력으로 여러 미제 사건을 다시 살펴보다 아직 손을 대지 못한 사건이 수두룩하다"며 "'망자의 한'을 달래고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미제 사건 용의자를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밝혔다.

j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