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터뷰

고선길씨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한다면 고선길씨(73·사진)의 책에는 광복, 6?25 사변, 이민, 4?29 폭동, 발명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책의 공간 역시 서산, 상해, 뉴욕, LA를 넘나든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꿈꾸고 치열하게 사는 일이다. 자아를 발견하고 평생 그것을 실현해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파동을 부르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늘 만남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했던 고 선길 선생의 삶을 되돌아봤다.

 고씨의 부친은 서산이 고향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앞장섰던 조부는 부친이 9세 되던 해 행방불명됐다. 이후 조모와 함께 상해로 건너간 부친은 근교에서 제과 공장을 경영하며 독립 자금을 지원했다. 부친의 강렬한 독립 의지는 해방 때까지 꺾이지 않고 이어졌다. 해방과 더불어 고국에 돌아온 고씨 일가는 세탁소, 국수 공장 등을 운영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6·25 사변이 일어났고 부친 역시 행방불명됐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고 선생은 부친이 지어둔 삼각지 근처의 이층집을 개조해 여관을 경영하고 또한 한남동에서 면세점 등을 운영하며 가장 역할을 자처했다.

 미국 행을 택한 것은 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청과상을 꾸려 착실하게 부를 일궈 나갔다. 또 동포끼리 서로 단결하고 단합하자는 내용의 광고를 신문에 게재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이 같은 동포 운동은 그가 LA에 새둥지를 튼 이후에도 계속됐다. '코리아타운을 빛냅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칼럼 기고 및 광고를 통해 민족의 우수성과 단결력을 호소한 것. 당시 할리우드 중심가에 오픈한 다섯 개의 기념품 가게도 날로 번창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건강을 해치는 유해식품은 일체 취급하지 않아 주위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 모든 일들이 더할나위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러던 중에 4·29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으로 엘릭셔 컴퍼니 공장장으로부터 양도 받은 글루 파트 시설과 재료 일체를 도둑맞았다. 그러나 고씨는 본인보다 더 막대한 피해를 당한 동포들에게 보상 및 도움이 돌아가기를 바래며 마음을 달랬다.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취미로 그림을 그렸던 고 선생은 점차 그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당시 물감은 여러모로 불편함 점이 많아 고 선생은 물감에 특수 글루를 혼합해 접착력을 높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연구를 통해 특수 물감을 개발했다. 이 물감을 사용해 작품활동에 전념한 그는 남가주 미술협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여겨본 한 지인은 고씨가 발명한 것과 유사한 것을 상품으로 출시해 팔기 시작했다. 배신감에 눈물까지 흘렸지만 고 선생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직접 쓴 시집을 선물하며 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인은 오히려 고씨 주최 모임이나 행사를 방해하며 그를 당혹시켰다. 고씨는 이 일을 평생 가슴에 묻고 가슴앓이를 하며 시커멓게 탄 가슴을 부여안고 살아가고 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고씨는 그의 발자취가 규명되기를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지인의 사과를 받아 관계의 매듭을 푸는 것, 그리고 한인사회 발전에 남은 여력을 보태는 일 뿐이다. 

고선길씨는
뉴욕 청과 상조회 이사, 할리우드 로타리 클럽 부회장, 할리우드 상공회의소 이사, 자유대한 지키기 국민운동 본부 공동회장, 민주 평통 자문 위원, LA 한인회 부회장, 한인 미술가 협회 회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