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4남, 57시간만에 첩보 영화같은 국내 압송

꼬리 잡힌 한보그룹 아들 정한근

322억 횡령 스위스 계좌 빼돌려 동창 신분 4차례 이름 바꿔
이름 속여 캐나다와 미국의 영주권·시민권 순차적으로 획득
에콰도르,출국사실 韓에 통보 파나마서 구금 두바이서 체포

마치 한 편의 첩보 영화와 같은 체포 작전이었다. 지난 18일 오전 6시35분 파나마 토쿠멘 국제공항에 '류 션 헨리'라는 이름의 미국 시민권자가 도착했다. 류씨는 파나마 공항에서 미국 LA행 비행기로 환승을 준비했다. 하지만 류씨의 지문을 확인한 파나마 이민청은 류씨의 입국을 막고 그를 공항 내 보호소에 구금했다. 류씨는 지난해 10월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적색수배 대상으로 지정된 정태수 한보그룹 전 회장의 아들 정한근(55)씨였다. 지난 21년간의 도주·잠적 행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8월 소재 본격 추적

23일 대검찰청 국제협력단에 따르면 회삿돈 322억원을 횡령하고 1998년 해외로 도피한 정씨는 그간 이름 네 개를 바꿔가며 캐나다와 미국, 에콰도르를 전전하는 도피생활을 했다.

정씨는 1997년 11월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EAGC)가 보유한 동아시아석유주식 매각자금 322억원을 횡령해 스위스의 비밀계좌로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그는 이 혐의로 1998년 6월 서울중앙지검에서 한 차례 조사를 받은 뒤 도주했다. 그해 7월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됐지만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영장은 집행되지 못했다. 검찰은 정씨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임박하자 2008년 9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 국외도피 및 횡령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이후 정씨 소재를 추적하던 검찰은 2017년 정씨가 미국에 체류 중이라는 측근의 인터뷰 방송을 계기로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정씨의 소재 추적에 나섰다. 정씨는 고등학교 동창 류씨 신분으로 2007년부터 총 네 차례에 걸쳐 영문 이름을 조금씩 바꾸는 수법으로 캐나다와 미국의 영주권·시민권을 순차적으로 획득했다. 국내 거주 중인 류씨는 캐나다에 가본 적도 없었고, 친구 정씨에게 이름을 빌려준 이후 2010년 개명했다. 검찰은 정씨가 류씨 이름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으로부터 류씨 이름으로 등록된 지문정보를 확보해 대검 국가디지털 포렌식센터(NDFC)에 등록된 정씨 지문과 대조해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 지문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륙 1시간전에 출국 연락

가짜 신분으로 살아온 정씨는 2017년 7월부터 에콰도르에 거주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의 에콰도르 내 소재지를 파악한 검찰은 에콰도르 법원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지만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이에 검찰은 우회적 방안으로 에콰도르 내무부에 정씨에 대한 강제추방을 요청했다. 에콰도르 당국은 정씨의 출국사실을 미리 알려주기로 우리 측에 약속했고 결국 이를 지켰다.

에콰도르 내무부는 지난 18일 정씨가 LA를 최종 목적지로 삼아 파나마로 출국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한국 검찰에 통보했다. 정씨가 탑승한 파나마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1시간 전이었다. 정씨의 출국사실을 통보받은 검찰은 미국 HSI 한국지부에 연락했고 HSI 파나마지부는 파나마 이민청에 정씨의 수배사실을 통보했다. 이를 토대로 파나마 이민청은 18일 파나마 공항에 도착한 정씨를 입국 거부한 뒤 공항 내 보호소에 구금했고 곧바로 현지 한국대사관에 이를 알렸다. 검찰은 법무부와 외교부, 경찰청 등과 협의해 정씨를 압송했다.

주파나마 한국 영사와 파나마 이민청 직원이 정씨와 함께 7시간에 거쳐 파나마에서 브라질로 이동했다. 이후 주브라질 상파울루 한국 영사와 브라질 연방경찰이 상파울루에서 두바이로 14시간에 걸쳐 정씨를 이송했다. 두바이에 호송팀을 급파한 검찰은 21일 오전 3시55분 두바이에 도착한 정씨를 인도받았고, 22일 오전 3시35분 국적기인 대한항공 편으로 국내로 최종 압송했다. 파나마에서 한국까지 꼬박 57시간이 걸렸다.

아버지 정태수 전회장
"작년 에콰도르서 사망"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사진)이 1년 전쯤 사망했다고 정한근씨가 검찰에서 진술했다. 검찰에 따르면 정한근씨는 "아버지가 1년 전쯤 에콰도르에서 돌아가셨고, 직접 임종을 지켰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재판을 받던 2007년 5월 병 치료를 명분으로 일본으로 출국했다가 그대로 도주한 정 전 회장의 소재는 물론 생사조차 파악되지 않았다.1923년생인 정 전 회장은 살아있다면 올해 96세다. 검찰은 정한근씨가 아버지에게 죄를 떠넘기기 위해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고 보고 에콰도르 사정당국과 공조해 수사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