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예 퇴진'모랄레스 사임 하루 만에 줄행랑…반대파 vs 지지파 극렬 시위 정부 기능 마비

볼리비아

곳곳 약탈 폭력, 군대·경찰 지휘체계마저 혼란
'쿠데타'인지를 놓고도 국제사회 둘로 갈라져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사임 하루 만에 멕시코로 망명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11일 "사랑하는 볼리비아를 버리고 멕시코로 떠나게 돼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면서 "힘내서 더 강해져 돌아오겠다"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의회에 대통령직 사직서를 내고 이를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다.
모랄레스 대통령이 급히 망명한 가운데 볼리비아 정치권과 수도 라파스 거리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대통령 사임 소식이 전해진 10일 저녁부터 대통령 퇴진 운동을 벌인 '부정 대선 반대'시위대와 '친(親)모랄레스' 시위대 일부가 엘알토·코타코타·차스키팜파 지역 거리에서 불을 지르고 가게를 털어 최소 20여 명이 다쳤다. 야권 시위대는 엘알토시 소재 모랄레스 대통령 소속당(사회주의운동당·MAS) 거점지를 공격했다. 이들이 라파스 시내 비야 빅토리아 소재 모랄레스 대통령 집과 코차밤바 소재 대통령 거주지에도 불을 지르는 동안 친모랄레스 진영 시위대는 엘알토에서 버스 64대를 부쉈다. 군과 경찰이 부랴부랴 비상경계 태세에 나섰지만 무정부 상태는 이어지고 있다.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하고 상대 진영과 마찰을 일으키자 당국 내부에서도 상황 대응·지휘 체계에 혼란이 생겼다. 현재 볼리비아는 무정부 상태에 가깝다.
모랄레스 대통령 사임 발표와 더불어 헌법상 임시 대통령직 승계 1위인 부통령이 사임했고, 그다음 순위인 상원 의장도 이미 사퇴했다. 일부 장관도 줄줄이 사퇴해 정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11일 국방부 장관도 사임했다.대통령 사직서를 의회에서 빨리 처리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당초 의회는 11일 긴급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사직서를 승인하려 했지만 비행편이 취소되고 거리 곳곳이 폭력으로 가로막힌 탓에 의원들이 제때 의회에 출석하지 못해 회의가 연기됐다. 모랄레스계 정당(MAS)이 상·하원을 각각 3분의 2 이상 차지한 상태이다 보니 대통령 사표 수리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야당 소속의 제닌 아녜스 상원 부의장이 다음 순위로 대통령 권한을 승계할 가능성이 높다. 아녜스 부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직을 맡을 준비가 돼 있다"며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볼리비아 사태가 쿠데타인지를 놓고 국제사회도 둘로 갈라졌다. 미국 국무부 관계자는 11일 로이터통신과 인터뷰하면서 "모랄레스 퇴진은 시위의 결과물이지 쿠데타가 아니다"고 말했다.
반면 멕시코의 에브라르드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볼리비아 상황은 군이 헌법을 위반해 대통령 사임을 요구한 것으로 정권에 대한 테러"라고 밝혔다. 이어 "오늘 저녁 모랄레스 대통령이 전화로 망명을 신청했고 우리 정부는 1928년 아바나 망명 국제 협약과 1954년 카라카스 외교 망명 협약, 정치인 망명에 관한 국내 법에 근거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집권 14년 만에 무릎 꿇은
'최초 원주민 출신 대통령'


볼리비아 역사상 최초의 아이마라족 원주민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된 모랄레스는 볼리비아의 빈농에서 태어나 목동, 공장 잡부 등으로 일했다. 좌파 사회주의운동(MAS) 소속으로 1997년 의회에 입성한 후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 결선까지 진출한 바 있다. 곤살로 산체스 데로사다 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반(反)정부 시위를 주도해 정치적 입지를 다진 이후 2005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무리한 장기 집권욕 때문에 그는 결국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됐다. 이미 한 차례 헌법의 연임 금지 규정을 바꿔 3선 대통령이 된 그는 올해 대선을 앞두고 다시 4연임을 위한 개헌을 시도했다. 그러나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헌법소원을 통해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위헌으로 만들며 기어이 4선에 도전했다. 지난달 20일 치러진 대선에서 볼리비아 선거 당국은 개표율이 83% 진행됐을 때 모랄레스가 야권 후보에게 7%포인트 앞선 상황에서 갑자기 개표 상황 발표를 중단했다. 하루 뒤 발표된 개표 결과는 모랄레스가 47%로, 2위 후보에게 10.5%포인트 앞섰다.
즉각 부정 선거 논란이 제기됐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대선 불복 시위를 이어가자 모랄레스는 이를 쿠데타라고 비판하면서 진압에 나섰다. 그간 시위로 최소 3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넘게 부상 당했다. 하지만 선거 개표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지자 그는 지난 10일 이에 굴복해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