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배우 이정은(49)에게는 최고의 한 해였다. 영화 ‘기생충’(봉준호 감독)부터 JTBC ‘눈이 부시게’. OCN ‘타인은 지옥이다’, KBS2 ‘동백꽃 필 무렵’(이하 동백꽃)까지. 어느 것 하나 이정은이 빛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꾸준히 제 일을 해왔을 뿐인데 이렇게 사랑받는 배우가 됐다는게 감개무량하다”는 이정은은 큰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지만, 거기에만 취해있고 싶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모두를 울린 7년3개월짜리 엄마 이정은

‘엄마 이정은’의 존재감은 컸다. 최고 시청률 23.8%에 빛나는 올 하반기 최고 흥행작 ‘동백꽃’에서 이정은은 생활고로 인해 딸을 버리고 평생을 후회 속에 산 엄마 정숙을 연기했다. 극 초반 비밀을 간직한 인물로 의뭉스러움을 남겼지만, 후반부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정숙의 과거가 드러나고 딸 동백(공효진 분)을 향한 절절한 모성애로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아냈다.

특히 방송 말미, 지병으로 생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던 정숙이 동백에게 남긴 ‘지난 34년 내내 엄마는 너를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했어’라는 편지 문구는 많은 이들의 ‘동백꽃’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동백꽃’을 마친 이정은은 드라마를 통해 “딸도 얻고, 손자도 얻고, 생명까지 얻었다. 행복하다”며 웃어보였다.

‘동백꽃’을 보면 정숙 캐릭터에 대한 임상춘 작가의 애정이 어린 시선이 돋보인다. 주연은 아니었지만 주연 못지 않은 존재감과 여운을 남기는 인물이다. 이 역시 이정은도 느꼈다며 “부담이 컸다”고 털어놨다. “아는 만큼 그 이상 연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오바하지 않으려 했다. 제가 아는 선에서의 최선을 다하는게 옳다고 생각해서 담백하게 연기했다.” 이정은은 담백했다고 하지만 이정은의 연기에 많은 시청자들은 눈물을 쏟았다.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까지도 이정은의 연기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는 후문이다. 덤덤한 얼굴로 희로애락을 응축시켜 보여주는 이정은표 감정 연기는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다가왔다.

◇ 영화부터 드라마까지…이정은의 ‘황금빛 2019’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조연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으로 춘사·부일·청룡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들어올린 이정은. 여기에 올해 미니시리즈 최고 시청률을 쓴 ‘동백꽃’으로 연말 시상식까지 예약해놓은 상태다.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로 발을 내딛고 데뷔 29년차에 ‘대세’라는 수식어를 얻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이정은은 들뜨기보단 담담했다. 오히려 겁이 난다는 그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커다란 주목 없이 계속 일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게 편하다. 다만 배우로서 농사지은 결과들이 잘 나와서 이렇게 운이 몰릴 수도 있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이제 제가 그 기대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까, 부담감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굉장히 부담이 크다.”

2019년, 이정은의 한해를 실감하느냐는 말에 부끄러운 듯 웃은 이정은은 “친근한 이미지와 평범한 외모의 배우가 늦은 나이에도 좋은 대본을 가지고 제 역할을 수행할 때 잘 되는 것을 보고 대리만족하시고 쾌감을 느끼셔서 주목해주시는 거라 생각한다. 제 연기력보다는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여성 역할에 대한 기대와 제가 그런 역할을 맡아서 좋아해 주시는 거 같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모든 것에 겸손한 그이지만 그런 이정은을 설레게 만든 건 그를 보며 위로 받았다는 대중의 목소리였다. “제작진들이 ‘어른답게’란 말을 뛰어넘는 인물을 만들어주신 덕에 현실에서도 대중이 저를 친구이자 언니이자 동생으로 느껴주신다. 기억에 남는 댓글 중 하나가 ‘세상일이 각박하고 힘든데 정은 씨의 연기를 보면 꼭 내 옆에서 나를 도와주고 응원해줄 것 같다’는 칭찬이었다”며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모두에게나 있지 않나. 그런 사람이 됐다는 건 배우로서는 최고의 칭찬이지 않을까. 연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말하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 연기 30년차 이정은, 내년도 바쁘지만 천천히

내년이면 연기 경력 30년차를 맞는 이정은은 앞으로 꾸준하고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말했다. “‘동백꽃’ 마지막회를 보면 정숙이 만보기를 달고 운동을 한다. 누구나 자기 속도를 아는게 중요한데, 현실에서 저도 만보기를 달고 차근차근 천천히 걷는 기분으로 걸어 나가려 한다.”

이정은은 ‘동백꽃’ 속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동백이 ‘나랑 7년 3개월 어땠어?’라고 물었을 때 ‘적금 타는 것 같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꼽았다. 그런데 실제 이정은의 연기인생도 이와 닮았다. 배우 이정은의 2019년은 28년간 꾸준히 부은 적금을 한 번에 탄 느낌이었다. “부을 때는 힘든데 탈 때는 기분 좋고 뿌듯하더라. 그간 적금을 드는 재미가 쏠쏠했던 거 같다. 이제 다른 적금을 부어야 하는데 걱정이다.(웃음)”

다가오는 새해에도 이정은은 달린다. 영화 ‘자산어보’(이준익 감독)와 ‘내가 죽던 날’(박지완 감독) 개봉이 예정돼 있고, 내년 3월 방영 예정인 양희승 작가의 KBS2 ‘한 번 다녀왔습니다’로도 시청자들을 찾아온다. 양희승 작가와는 tvN ‘고교처세왕’, ‘오 나의 귀신님’, ‘아는 와이프’에 이어 네 번째 인연인 그는 “제가 전혀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 궁금하시다고 하시더라. 저도 제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다”고 차기작 선정 이유를 밝히며 “6개월의 대장정을 달려야 하니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다부진 각오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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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