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전력질주하라', '홈런을 쳐도 조용히 베이스를 돌아라', '투수가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도 눈을 마주치면서 도발하지 마라'….
야구에는 규정에 적혀있지 않은 불문율이 많다. 이에 따라 대다수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결정적인 순간이 아닌 이상 그라운드 위에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이나 애런 저지(뉴욕 양키스)와 같은 젊은 슈퍼스타들 또한 홈런을 터뜨려도 배트플립(타자가 홈런을 친 후 배트를 던지는 행위)을 하지 않는다.
그런 불문율의 세계에 조금씩 변화의 기운이 일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금기시 됐던 배트플립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타자는 투수를, 투수는 타자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프로선수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 또한 상품성을 높이고 리그가 흥행력을 갖추는데 중요한 요소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수십년 동안 이어졌던 불문율이 깨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발단은 최근 2경기로 시작됐다. 지난 17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캔자스시티의 경기 4회 화이트삭스의 팀 앤더슨이 홈런을 친 후 배트를 던지며 환호했다, 그러자 앤더슨에게 홈런을 맞은 캔자스시티 선발투수 브래드 켈러는 6회 앤더슨에게 빈볼을 던졌고 곧바로 양팀의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보복구를 던진 켈러에게 5경기 출장 정지, 벤치 클리어링 과정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한 앤더슨에게도 1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지난 7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신시내티 데릭 디트리치는 피츠버그 선발투수 크리스 아처를 상대로 홈런을 친 후 오랫동안 타구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처는 다음 타석에서 디트리치를 향해 위협구를 던졌다. 디트리치 등 뒤로 투구가 지나갔지만 누가 봐도 고의성이 다분한 공이었다. 주심은 곧바로 아처에게 경고를 내렸고 이에 신시내티 데이비드 벨 감독이 항의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불과 열흘 사이 두 차례나 불문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선수들이 퇴장당하고 징계를 받고 있다.
신시내티 좌완투수 아미르 가렛은 이런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그는 자신의 SNS를 통해 "많은 야구선수들은 다른 스포츠에서는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타자가 배트플립을 하는 게 화가 난다고? 기분이 상한다고? 생각해보자. 농구에서 누군가 당신의 머리 위로 덩크를 한 후 지저분한 얘기를 해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농구에선 이런 게 불문율이 되지 않는다"면서 "나는 타자가 무엇을 해도 괜찮다. 배트 플립을 했다면 다음에 내가 삼진을 잡고 똑같이 환호하면 되는 것이다. 타자들에게 무엇이든 하라고 말하고 싶다. 홈런을 치고 배트를 던져도 되고 문워크를 해도 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미국에서 메이저리그의 인기가 감소하는 이유로 긴 경기 시간과 더불어 개성적이지 못한 선수들을 꼽는다. NFL과 NBA 선수들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화려한 세리머니를 펼치는 것과 달리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너무 얌전하다고 지적한다. 메이저리그에서 유별날 정도로 세리머니가 많은 브라이스 하퍼(필라델피아)는 배트플립 등의 불문율 문제를 두고 "세상을 떠난 호세 페르난데스와 같은 투수들은 타자가 무엇을 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생각해봐라. 불문율을 따른다면 타자는 끝내기 홈런을 치고도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내야를 돌아야 한다. 그것도 투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라고 강하게 반박하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야구기자 '디 애슬레틱'의 켄 로젠탈은 "KBO 리그와 중남미 리그에선 배트플립이 허용된다. 반면 메이저리그는 예전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쉽지 않은 문제다. 불문율에 대해선 선수마다 의견도 다르다. 선수들이 감정을 표출하는 게 마케팅에서 도움이 되는 부분도 분명있겠지만 오랫동안 지켜온 일을 바꾸라고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윤세호기자